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영성)/통일 과정 (문단 편집) == [[위(전국시대)|위(魏)나라]] 멸망(기원전 225년) == 진왕 정 21년, 기원전 226년 진군은 연나라의 수도 계(薊)를 점령하고 북방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취함과 동시에 주공을 남쪽으로 틀었다. 진나라 명장 왕전의 아들 왕분은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의 북부 지역[* 지금의 허난성 남부]을 공략하여 열 개의 성을 점령해 초군을 위협하며 전선을 형성했다. 갑작스럽게 불의의 타격을 받은 초나라는 진군의 위세에 압도되어 감히 군대를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게 초나라와 위나라에 대한 양면전선을 형성하며 위나라에 대한 초나라의 지원을 차단했다. 진왕 정 22년, 기원전 225년 왕분이 이끄는 10만 진군은 북상하여 위나라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위나라의 경내로 들어서 빠르게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 지금의 허난성 개봉]에 다다른 다음 성을 포위했다. 갑작스럽게 진나라의 침공을 받아 수도가 포위되었지만, [[위왕가|위왕 가]](魏王 假)와 대량의 군민들은 요새화된 도시의 방어력에 의지하여 결사 항전을 택했다. 대량성은 왕분에 의해 이미 고립무원의 처지가 됐지만, 이 성은 유구한 항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위 [[위무후|무후]] 시기에 건설되어 위 [[위혜왕|혜왕]](魏 惠王) 때 수도가 된 대량성은 주도면밀하게 계획되어 완성된 도시였다. 대량성은 크기 자체도 거대한 데다 성벽도 높았다. 주위에 종횡으로 그물 같은 수운망마저 가지고 있어 물자 공급이 원활한 데다 적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도 유용했다. 이와 같이 도시 전체가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방어 체계의 대량성은 침략군에게는 골칫거리였다. 진나라의 군사가 용맹하다 하나 대량성의 견고한 방어시설은 아무리 진군이라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왕분이 이끄는 진군은 여러 날에 걸쳐 대량성에 수차례의 맹공을 가했지만 요새화된 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불가능해 사상자만 늘어날 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대량성의 군사는 10만에 달했고, 성내의 군량과 양초는 충분했다. 이대로라면 아마 몇 년이 걸려도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었다. 수 차례의 공세가 대량성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전황이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해지는 것은 진나라였다. 진군이 착실히 관동 제후들의 영토를 잠식할수록 그에 상응하여 전선이 늘어나 신경쓸 것이 많아졌다. 북방에서는 조나라와 연나라의 잔여세력이 버티고 있고, 언제 터질지 모를 점령지의 반란을 대비해야 했다. 한 해 전에는 한나라의 구귀족들이 구도 신정에서 집단으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원교근공 정책과 진나라의 내부 공작에 힘입어 그동안 제나라는 진나라의 충실한 우방국을 자처하며 타국의 멸망을 방관해왔지만, 6국의 멸망이 실제적 위협으로 다가온 이상 언제까지 방관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만약 진나라의 대군이 계속해 위나라에 묶인 채로 있는다면 분명히 새로운 위협이 진나라의 야욕을 좌절시킬 것이었다. >"무릇 한(韓)이 망한 뒤에 출병하는 날이면 위(魏)가 아니면 공격할 상대가 없습니다. 진(秦)은 본디 회(懷)ㆍ모(茅)ㆍ경구(邢丘)를 소유했는데, 궤진(垝津)에 성을 쌓고 하내(河內)에 임한다면 하내(河內)의 공(共)ㆍ급(汲)은 반드시 위태롭게 되며, 정(鄭) 지역을 소유하고 원옹(垣雍)을 얻어서 형택(熒澤)의 물을 사용해 대량(大梁)에 붓는다면 대량(大梁)은 반드시 망합니다." 일찍이 [[신릉군]]이 한나라를 구원하자며 위왕에게 유세할 때 수공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었다. 대량은 오늘날의 허난성 개봉으로 황하의 거센 물줄기가 인접한 곳이다. 또한 대량성은 그 지세가 낮아 고도가 황하를 밑돌았다. 정공법으로 대량성을 함락시키기 힘들다고 판단한 왕분은 방법을 바꾸어 대량을 수몰시키기로 했다. 대량의 지세를 파악한 왕분은 군사들로 하여금 대량성 주위의 수운로를 장악하여 개조하게 하고 대량성을 둘러싸는 제방과 대량성 서북쪽에 물길을 틀게해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그 하류를 막는 제방을 쌓도록했다. 때는 초봄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진군이 제방을 쌓자 10일에 걸쳐 쉬지않고 비가 내려 둑에서 진동하는 물살이 거대했다. 충분한 물이 쌓이자, 왕분의 명령하에 둑은 파괴되고 대량성은 물에 잠겼다. 대량성이 물에 잠기고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사상자가 생겨났다. 구원군은 오지 않았고 한번 대량성을 덮친 물은 빠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성내가 물에 잠기자 물에 닿은 곡식은 썩어들어갔다. 오랫동안 물에 잠긴 군민들의 피부마저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우물마저 오염되어 오염된 물을 먹고 죽는 자가 속출했다. 대량성이 물에 잠긴 지 세 달이 되어 물에 잠긴 성벽이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점차 대량성의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해 성의 곳곳이 뚫리게 되었다. 대량성의 성벽이 무너지자 왕분은 총공세를 명령했다. 수차례의 공방전 후, 위왕 가는 더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 판단해 성문을 열고 진나라에 항복했고 위나라는 멸망했다. 위왕 가는 머지않아 살해당했고[* 《열녀전》(烈女傳)에서는 살해당했다고 적혀있지만 《사기》(史記)에서는 위왕이 진나라에 의해 살해되었는지 여부가 기록되지 않았다.], 대량의 격렬한 저항에 분노한 진왕 정은 대량을 철저히 파괴해버렸다.[* 이후 대량은 일개 현으로 완전히 몰락해 수나라 대에 [[대운하]]가 건설될 때까지 이후 [[한나라]]와 [[위진남북조시대]]의 수백년 역사 동안 이렇다 할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